2017년 7월 1일 토요일

<쇼트 피스(2014)> - 짧은 내용, 긴 여운



마치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처럼 <쇼트 피스>는 근래 일본의 TV 애니메이션이 다루길 꺼리는 요소로 가득 찬 극장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디자인의 교복을 입은, 마찬가지로 현실에서는 존재할 리가 없는 미소녀, 사춘기에 고통받는 남주인공이 내뱉는 손발이 고통스러운 대사, 순수하게 상업적인 이유로 완결되지 않은 작품을 영상화해서 '급전'을 땡긴 후 결말은 시청자들의 상상에 맡기는 제작위원회의 관행에 빳빳한 중지를 날리고 싶었던 걸까요? 2013년에 개봉한 <쇼트 피스>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아득한 과거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과거 이야기를 하는 것만큼 과거로 돌아가는 효과적인 방법은 없겠죠.

하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좋았던 시절로 넘어가기 전에 작품이 만들어진 배경을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네요. 여느 영화와 마찬가지로, <쇼트 피스> 역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제작된 '상업' 영화입니다. 스튜디오부터 '기동전사 건담', '카우보이 비밥' 등 걸출한 상업 애니메이션을 배출한 선라이즈라는 점이 이를 방증합니다. 다만 여기에 최초 상영된 곳이 2012년 프랑스의 안시(Annecy)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였고 이후, 히로시마, 부산 국제 영화제를 거쳐 일본의 25곳의 영화관에 제한 상영되었다는 특이한 이력이 붙습니다. 즉, 출품용 영화였죠. 그러니 두터운 팬층 덕택에 꾸준한 악평 속에서도 매년 꼬박꼬박 나오는 양산형 '라이트' 애니메이션과는 달라야 할 필요가 있었고, 관객도 거부감이 덜했을 거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물론, '관객이 작품에 어떤 기대를 했느냐'와 '작품이 관객의 기대를 충족했느냐'는 전혀 별개의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쇼트 피스>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후자의 답을 찾아보려 합니다. <쇼트 피스>는 4개의 다른 에피소드를 <쇼트 피스>라는 제목으로 묶은 68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모음입니다. 원제는 'SHORT PEACE(짧은 평화)'이지만, 사실 각 에피소드는 다루는 주제도, 소재도, 런닝 타임도 일관적이지 않습니다. 중의적 효과를 노리지 말고 그냥 'SHORT PIECE(단편)'라는 제목을 붙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각설하고, <쇼트 피스>의 에피소드는 아래와 같습니다.

0. <오프닝 애니메이션>
TV 애니메이션과 비슷하게 <쇼트 피스>도 오프닝 영상과 함께 시작합니다(다행인지 오프닝 곡은 부르지 않습니다). 내용은 도리이(일본 신사 앞에 세워진 거대한 나무 기둥) 밑에서 숨바꼭질을 하던 소녀가 눈을 감고 수를 세다 눈을 떴더니 웬 별천지로 워프하게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소녀는 흰 토끼를 따라갑니다만 다행인지 썬글라스를 쓰고 검은 옷을 입은 괴한과 마주치진 않고 수수께끼의 빛나는 구체에 올라타더니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모습이 변합니다. 그러더니 빛 속에서 <쇼트 피스>라는 타이틀이 나타나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참고로 저는 약을 하지 않습니다.

1. <츠쿠모>
배경은 전국시대로 추정되는 중세 일본, 길 잃은 나그네가 어느 사당에서 비를 피하다 이상한 일을 겪게 됩니다. 정교한 3D 그래픽으로 그려진 캐릭터와 배경, 그리고 기기묘묘한 소품들이 인상적으로, 이는 뒤에 올 에피소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인물 작화의 경우, 움직임이 다소 뻣뻣한 것만 빼면 평면 그림과 차이를 알아채기 힘들어 제작진의 정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만 주제 자체는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말자"는 소박한 스케일이어서, 아까 빛나는 구체를 탄 소녀가 이후 세계의 진실을 알고 쿵푸 마스터로 각성하진 않았는지가 더 신경쓰이더군요.

2. <불의 요진>
배경은 임진왜란 이후로 추정되는 중세 일본의 에도(도쿄), 마츠키치와 목소리가 묘하게 하야미 사오리를 닮은 와카는 담 하나를 마주하고 사는 소꿉친구입니다. 부족할 것 없이 자란 두 사람이지만, 불을 좋아하는 마츠키치는 가업을 팽개치고 남의 집 불구경만 하다 결국 아버지로부터 의절당하고 양갓집 규수로 길러진 하야미 사오리, 아니, 와카는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될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작풍이 매우 독창적인 에피소드입니다. 마치 한폭의 전통 민속화처럼 거의 대부분의 장면이 부감법으로 그려졌고, 수채화를 연상시키는 색채와 3D 작화의 강점인 풍부한 질감이 어우러져 단지 전통의 재현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사족으로, 하야미 사오리와 마 모씨는 끝내 소꿉친구 커플에 너무나 어울리는 결말을 맞게 됩니다. 그저 마이클 베이가 오르가즘을 느낄 엔딩이라고만 해두죠.

3. <GAMBO>
슬슬 패턴이 보이기 시작하는군요. 배경은 '또' 전국시대로 추정되는 중세 일본. 코카콜라 로고가 언제라도 눈앞에 어릴 것만 같이 새하얀 백곰이 무사와 결투를 벌입니다...만 일방적으로 무사를 떡실신시키더니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무사에게 자비를 베풉니다. 그리고 별안간 하늘에서 불덩이가 떨어집니다. 한편 가까운 마을, 마을 사람들이 피부가 붉은 정체불명의 괴물을 치료하다 정신을 차린 괴물의 습격을 받아 사상자를 내고 처녀 한명이 납치당합니다. 전통 민담과 SF적 소재를 적절하게 섞은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특히 괴물의 정체가 밝혀지는 장면은 보시기에 따라 충격적일 수 있습니다. 거대 괴물들이 서로 피가 튀고 뼈가 부숴져라 싸우는 모습도 볼거리입니다.

4. <무기여 잘 있거라>
드디어 대망의 마지막 에피소드입니다. 헤밍웨이의 동명의 소설에서 빌려온 제목을 가진 이 에피소드는 제목과는 정반대로 런닝 타임 내내 죽기 살기로 싸우다가 마지막 5분이 되어서야 관객이 제목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구성입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훌륭한 에피소드이기도 하죠. 이야기는, 놀랍게도, 근미래의 일본에서 시작합니다. 모종의 이유로 후지산은 분화하고 도쿄 인근 지역은 대충 망한 뒤 사막과 흉폭한 로봇이 지배하는 죽음의 땅이 되었습니다. 그런 황야를 질주하는 장갑차. 그 안에는 제각기 "이번 일이 끝나면 무슨 일을 하며 살거냐" 따위의 흉흉한 악담을 서로에게 내뱉는 일군의 용병들이 타고 있습니다. 이들은 폐허가 된 도쿄에서 미사일 탄두를 찾아내야 합니다. 살인 로봇과의 전투는 덤입니다. 눈에 먼저 들어오는 것은 용병들이 입고 있는 전투복입니다. 묘하게 우주복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에, 무슨 원리로 작동하는지 알 수 없는 장치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놀랍게도 이 장치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닙니다! 20분을 살짝 넘는 런닝 타임동안 화면은 전투복에 박혀 있는 거의 모든 장치들이, 여전히 미스테리한 원리로, 작동하는 모습을 하나하나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보여줍니다. 꼼꼼하게 계산된 액션씬의 각본 덕분에 가능했죠. 흡사 할리우드의 그것에도 밀리지 않는 스릴감과 일본 애니메이션의 자랑인 디테일, 어느 쪽도 놓치지 않고 잡아낸 이 액션씬이 아니었다면 결말부에 울려 퍼지는 노래에 전율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그럼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죠. <쇼트 피스>는 관객의 기대를 충족하는 작품일까요? 답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언급했듯이, <쇼트 피스>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과거로 돌아가는 애니메이션입니다. 과감하게 교복입은 미소녀가 대세가 되기 까마득히 이전으로 회귀해서 멀리서는 일본의 전통설화, 가까이서는 90년대 유행한 세기말 SF가 지녔던 예스러움을 세련된 기술로 되살렸죠. 마치 세기를 넘나드는 리메이크를 보는 것 같다고 할까요? 무엇보다 이 작품의 3D 그래픽은 제작된지 5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경이롭습니다. 하지만, 예스러움과 촌스러움은 종이 한장 차이입니다. 장담컨대 여러분은 동화로든, 소설로든, 영화로든 비슷한 이야기를 변형된 형태로(혹은 똑같은 형태로) 이미 수십번은 들어봤을 겁니다. 만약 여러분이 새부대엔 새술이 담겨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은 기대를 배신할 가능성이 높아요.

다만, 오래 묵힌 추억이 있다면 그 짙은 냄새가 반가울지도요.


[평점: 7/10]

* 다만 마지막 에피소드인 <무기여 잘 있거라>에는 8점을 주고 싶습니다. 비록 주제는 상투적이었지만 분량의 한계가 있었지만 거기까지 가는 과정은 제 기준으로 거의 완벽했어요. 감히 이 에피소드 하나만으로, <쇼트 피스>는 볼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 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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