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15일 목요일

국정 교과서 논란 2탄 - 레이디 가카의 큰 그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에 대해 짤막한 변을 남긴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그간 뉴스, 블로그, SNS에서 쉴새없이 쏟아져 나온 온갖 격앙된 반응을 보고 있자니 엊그제가 아주 먼 옛날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결국 우리 정부는 예상에서 단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기어코 한국사를 '국사'로 되돌리기로 결정했다. 당연히 한국의 사학계는 발칵 뒤집혔고 교수들은 집단으로 항의성명을 내고 국정 교과서 집필거부 움직임을 보이는 등 사태는 점점 커지고 있다. 현재 10월 15일 기준, 공식적으로 국정 교과서 집필을 거부한 교수의 수는 이미 천여명에 육박하고 있으며 이중 대부분이 오늘 하루 사이에 모였다는 점이 경이롭다. 여느 학자가 그렇듯이 사학자들 역시 남의 연구성과를 물어뜯는데 도가 튼, '파이터' 기질 충만한 이들 아니던가. 그랬던 그들이 하루만에 고대사, 중세사, 근현대사 등 전공분야를 막론하고 하나의 기치 아래 운집하는 기적을 목도하니 국민통합을 추구하는 레이디 가카의 큰 그림에 경탄을 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대붕의 뜻을 모르고 지껄이는 참새 무리가 많아 눈살을 찌뿌리게 한다. 오늘 인터넷에서 본 글들만 해도 그렇다. 한 역사학자가 말하길, "훌륭한 지도자는 역사를 바꾸고 저열한 지도자는 역사책을 바꾼다"고 한다. 무지의 소치가 따로 없다. 레이디 가카는 역사책을 바꿈으로써 역사에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역사가 레이디 가카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레이디 가카와 그 가족사는 최소한 임기를 마치는 1년 동안은 교과서에 남아 수많은 이들에게 큰 웃음, 빅재미를 선사하고 마지막엔 어느 쓰레기 처리장 한켠에서 따뜻한 온실가스로 화하여 조용히 생을 마감할 것이다. 실용적인 측면 역시 간과할 수 없다. 레이디 가카의 가족사가 대폭 증편된 교과서는 그 두툼한 무게로 컵라면 뚜껑을 묵직하게 누를 것이며 냄비 받침판으로도 그 효용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모든 혜택을 전국의 모든 학생들이 공짜로 누린다고 생각을 해보라! 학생들이 쥐꼬리만한 용돈을 누름판과 받침판 사는 데 낭비할 일이 없으니 천문학적인 돈까지 아낄 수 있다. 그렇다! 레이디 가카께서는 역사를 창조함으로써 마침내 경제마저 창조하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계신 것이다.




14일, 새누리당의 유력 대선후보로 꼽히는 김무성 대표는 국회에서 "학부모들께서 아이들이 학교에서 먹는 식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아이들 머리속에 어떤 것이 들어가서 자리잡을지에는 관심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며 작금의 역사 교육 행태에 우려를 표했다. 일각에서는 이 발언을 야당의 무상급식 정책을 비꼬면서 동시에 김무성 대표 본인의 편협한 역사관을 드러내는 몰상식한 발언이라며 비판했지만 이 역시 옹졸한 인간들의 아우성에 불과하다. 멀쩡한 서울 시장 한명의 정치인생을 사단낸 무상급식 이슈를 김 대표 같이 노회한 정객이 이제와서 뜬금없이 꺼내들리가 없지 않은가. 그보다는 10년 전 레이디 가카께서 사학법 개정을 저지하신 덕분에 고등학교 학생들의 급식비를 마음껏 횡령할 수 있었던 서울의 한 사학재단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고 보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김 대표가 학부모들의 교육에 신경 쓰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기억하자. 새누리당은 게임 셧다운제로 한국의 학생들을 게임의 사악한 마수로부터 구해냈고 창작물 속 청소년을 성폭행한 범죄자를 실제 성폭행범보다 더 높은 형량으로 응징하는 아청법을 통과시킨 혁신적인 정당이 아니던가. 그런 당의 대표가 아이들의 교육을 걱정하지 않을리 있겠는가.




새누리당이 같은 날 길거리에 내건 플래카드는 더욱 아프게 의표를 찌른다. "김일성 주체사상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습니다". 비단 학생들뿐이랴.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한국의 근현대사 역시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복선은 교과서 곳곳에 교묘하게 숨어있다. 가령 한국 전쟁 이후, 우리의 국부 이승만 대통령이 종국에 독재자로 매도되는 모습은 보천보 전투로 영웅이 된 김일성이 인류 최악의 독재자로 전락하는 모습과 기묘한 중주를 이룬다. 5.16 군사 혁명이라는 구국의 결단 끝에 경무대로 영전한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가?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아들 김정일에게 자리를 물려주려고 대규모 숙청이라는 '구국의 결단'을 내린 김일성을 겹쳐보고 있지는 않았나? 1972년 남북간 접촉이 성사된 직후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시대를 열고 동시에 김일성이 사회주의 독재체제를 강화한 대목에선 운명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흉탄 두발에 서거하는 부분에서 적지 않은 이들이 죄책감은 커녕 쾌감을 느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적화(赤化)되었는지를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이제 우리는 진실을 안다. 우리는 북한이 구축한 매트릭스, 아니 북트릭스 속에서 생각이 거세된 채 하루하루를 똥만드는 기계로 살아온 것이다. 비극은 여기서 끝나야 한다.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주자! 환한 웃음을 주자! 따뜻한 불쏘시개를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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