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15일 목요일

<미들어스: 섀도우 오브 모르도르(Middle-earth : Shadow of Mordor, 2014)> 리뷰




예, 알아요. 버튼만 누르면 자동적으로 콤보가 이어지는 전투는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에서, 벽과 지붕을 자유로이 오르내리는 조작 방식은 <어쌔신 크리드>에서, 그리고 온갖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적들을 몰래 제압하는 시스템은 양쪽 모두에서 배낀 거라는 사실쯤은요. 근데 어쩌겠어요. 끝내주게 재밌는걸!


타산지석

<미들어스: 섀도우 오브 모르도르(이하 '미들어스')>는 그리 독창적인 게임은 아닙니다. 초반부 튜토리얼만 봐도 이 게임이 어디서 영감을 받았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다행히도 <미들어스>는 훌륭한 선배들을 롤모델로 삼았고 그들의 성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모범생 후배였습니다.


<미들어스>는 액션 게임입니다. 그리고 2010년대 가장 성공한 두 액션 게임 프랜차이즈의 유산을 그대로 가져왔죠. 바로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의 프리플로우 컴뱃(free-flow combat) 시스템과 <어쌔신 크리드>의 파쿠르 조작(parcours movement) 시스템입니다.




프리플로우 컴뱃은 다수의 적을 상대로 플레이어가 물 흐르듯 부드러운 전투를 가능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 시스템에서는 플레이어가 공격 버튼을 연타하면 조작 캐릭터는 화려한 움직임으로 적을 공격, 콤보를 올리고 그렇게 일정수의 콤보가 누적되면 플레이어는 강력한 특수 기술을 사용해 적들을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콤보는 도중에 적의 공격을 받으면 중단되기 때문에 위험할 땐 반격과 회피를 해야만 합니다. 또 몇몇 적은 특정한 기술로만 공격할 수 있으므로 적당한 순간에 적당한 기술을 섞는 순발력도 중요하죠.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버튼을 눌러 흐름을 이어야 한다는 점은 흡사 리듬 게임을 떠올리게 합니다.




파쿠르(parcours)란 원래 프랑스어로 '길'을 뜻하는데 오늘날에는 둔턱이나 벽, 철봉 같은 장애물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목적지까지 빠르게 도달하는 스포츠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군중으로 가득찬 도심 속에서 목표를 암살해야 하는 <어쌔신 크리드>의 주인공은 높다란 건물과 외줄, 비좁은 난간 위에서 파쿠르를 선보이는데 조작 방식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플레이어는 그저 '달리기' 버튼을 누른 채 장애물에 돌진하면 됩니다. 앞에 벽이 있나요? 벽으로 달려가세요! 지붕과 지붕 사이를 건너고 싶다고요? 그냥 달려요! 그러면 캐릭터가 알아서 벽을 타고 지붕을 넘어줄 겁니다. 고작 버튼 하나만으로요. 그럼 플레이어는 적당한 곳에 숨어 적을 어떻게 덮칠지 생각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미들어스>의 개발사, 모노리스(Monolith)는 두 시스템이 완벽하게 작동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전투에서 빠르게 콤보를 이으려면 탁 트인 벌판에 때릴 수 있는 적들의 수가 충분히 많아야 합니다. 반대로 잠입과 암살은 적들이 군데군데 분산되어 있는 가운데 모습을 감출 수 있는 다양한 지형지물과 장치가 있을 때 가능합니다. 두 시스템을 모두 도입하려면 밸런스 문제까지 대두됩니다. 전투가 지나치게 쉬우면 플레이어가 귀찮게 숨어다닐 이유가 없고 은신의 이점이 전투의 그것보다 훨씬 크다면 아무도 정공법을 택하지 않을 테니까요. 참 골치아픈 딜레마입니다.


두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다.

모노리스가 내놓은 해법은 단순했지만 무척 정교한 것이었습니다. 하나의 오픈 월드에 거대한 평야, 복잡한 구조의 요새, 몸을 숨길 수 있는 수풀과 각종 구조물들을 모두 망라한 것입니다. 그리고 적들은 기본적으로는 무리를 지어 기습에 대비하게 하되 시야가 닿지 않는 건물 지붕과 난간 등지에는 적의 궁수를 한명씩만 배치함으로써 잠입을 용이하게 만들었습니다. 이걸로 플레이어들에게 선택권이 생겼음은 물론, 프리플로우 컴뱃과 파쿠르 조작의 이점까지 모두 챙길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뿐이었다면 <미들어스>는 '그나마 괜찮은' 아류작 중 하나에 불과했을 겁니다. <미들어스>는 타인의 성공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기에 깊이를 더했습니다. 먼저 <미들어스>에선 활을 이용하여 상상을 초월한 온갖 플레이를 펼칠 수 있습니다.  플레이어는 멀리서 적을 소리 없이 죽이는 건 기본이요, 칼싸움 중에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레골라스마냥(!) 활로 적을 공격해 콤보를 쌓는 것은 물론, 도망치는 적의 발을 쏴 멈추게 하거나 심지어는 멀리 떨어진 적에게 자기자신을 쏘아보내서(?!) 기습할 수도 있습니다. 또 활로 적을 조준하면 플레이어의 '포커스(focus)' 게이지가 소모되며 시간이 느려지는데 덕분에 플레이어는 정확하게 적의 원하는 부위-아마도 대부분 머리-를 노릴 수 있습니다.




적들을 몰래 해치우는 방법도 여러가지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은신 자세를 취한 채 접근하여 적의 시야가 닿지 않는 곳-배후나 위아래-에서 단검으로 '쓱싹'하거나 멀리서 활로 저격하는 것이지만 주변의 오브젝트를 전략적으로 이용하거나 특수한 스킬을 사용하면 보다 재미난 상황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목표가 무리 한가운데 있다면 근처에 매달린 파리집을 떨어뜨려 적들을 흩어놓는 게 좋습니다. 아니면 제가 선호하는 '주변의 맹수를 유인해서 무리 전체를 밥으로 던져주기' 작전도 있습니다. 파리도, 맹수도 없다면 적의 음료에 독을 타서 무리에 내분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적을 세뇌하는 기술을 배웠다면 아예 군대를 만들어 상대를 쓸어버리는 선택지도 있습니다.


액션 게임에서 정치하기, 네메시스 시스템.

<미들어스>는 기존의 시스템을 개량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제작사 모노리스는 <미들어스>에 네메시스 시스템(nemesis system)을 도입하여 다른 아류작들과 확실히 선을 그었습니다. <미들어스>의 적들은 모두 계급이 있습니다. 계급은 일반병-대장-베테랑 대장-엘리트 대장-족장 순으로 올라가는데 무수히 많은 일반병들과 달리 대장급 이상의 적들은 최상위 계급, 족장 5명과 휘하 15명의 대장까지 총 20명뿐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능력치는 일반병들을 크게 웃돌며 저마다 다양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대장은 일반 공격이 먹히지 않고 어떤 대장은 싸움에서 절대 후퇴하지 않으며 어떤 대장은 무시무시한 한방을 가지고 있습니다. 동시에 대장급 적들은 약점 역시 가지고 있기에 정보만 있다면 이들을 공략할 방법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작중에 정보를 알고 있는 적이나 죄수를 심문하거나 곳곳에서 발견되는 기밀 문서를 읽으면 원하는 대장의 특성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들어스>의 대장들은 단순한 경험치 셔틀이 아닙니다. 20명의 대장들은 비열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라 출세를 위해서라면 동족의 등에 칼을 꽂는 짓도 서슴지 않습니다. 비슷한 계급끼리 더 높은 직위를 두고 다투는 건 예사이고 최상위 계급조차 항상 부하의 배신에 노출되어 있죠. 플레이어들은 네메시스 시스템 속에서 끊임없이 벌어지는 암투에 개입하여 전황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습니다. 혼자 상대하기 껄끄러웠던 대장을 다른 대장의 손으로 해치운다거나 내가 세뇌시킨 대장을 족장의 자리에 앉히는 일따위로 말이죠. 하지만 네메시스는 항상 당신의 편이 아닙니다. 플레이어가 대장의 손에 죽는다면 그 대장은 더 높은 레벨과 계급을 얻게 되어 다음 전투에서 곤욕을 치르게 될 겁니다. 심지어 플레이어를 죽인 일반병조차 승진을 합니다. <미들어스>의 세계에서 죽음은 의미가 있습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을 그대로 옮기다. 단, 스토리 빼고.

이제 조금 불편한 부분으로 넘어가보죠. 게임의 스토리입니다. <미들어스>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미들어스>의 배경은 <반지의 제왕>의 세계, 구체적으로는 가운데땅(Middle-earth)입니다. 악의 군주, 사우론은 인간과 엘프 연합군에 의해 쓰러진 이후 암암리에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결국 모르도르의 잔존 오크들을 규합해 곤도르 왕국을 공격합니다. 이 때 곤도르를 지키던 파수꾼 탈리온은 사우론의 수하인 검은 손, 검은 탑, 검은 방패에게 눈 앞에서 가족을 잃는 치욕을 당하고 자신도 목숨을 잃을 뻔하나 순간 고대 엘프의 영혼이 자신에게 빙의한 덕분에 죽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엘프는 탈리온에게 가족의 복수를 도와주는 대가로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줄 것을 요구하고 탈리온은 이에 응하면서 <미들어스>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톨키니스트가 아닌 입장에서 <미들어스>가 얼마나 소설 <반지의 제왕>에 충실했는지 왈가왈부할 수는 없겠지만 보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영화 <반지의 제왕>이 게임에 남긴 흔적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미들어스>의 세계는 영화의 축소판입니다. 북적거리는 요새와 쇠락한 고대 유적, 흉측하지만 친숙한 오크들의 모습은 영화와 판박이입니다. 게임에서만 등장하는 캐릭터들조차 그 외견과 행동이 영화판의 등장인물들과 비교해도 위화감이 들지 않습니다. 영화판에 한정한다면 <미들어스>는 <반지의 제왕>의 '분위기'를 충실히 구현한 작품입니다.


유감스러운 부분은 이 게임이 <반지의 제왕>의 '드라마'를 한편의 몰개성한 복수극으로 퇴화시켰다는 점입니다. 주인공인 탈리온은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굴곡도 없이 복수만을 향해 전진할 뿐입니다. 간달프의 재치도, 아라곤의 근엄함도, 보로미르의 고뇌도 이 3류 블록버스터 영화의 주인공에게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반지의 제왕> 캐릭터들조차 플롯 장치로만 사용되고 금세 퇴장하는 지경에 이르면 실소가 나옵니다.


<미들어스>의 심심한 미션 구성과 연출 역시 이야기 몰입을 저해하는 요소들입니다. 탄탄한 기본기와 뛰어난 자유도를 갖춘 액션 게임답지 않게 메인 미션과 서브 미션은 일방적인 잠입/암살/전투의 지리한 반복이라 어떤 사건이 펼쳐져도 별 인상이 남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한창 흥미진진한 가운데 갑자기 컷신이 나와 맥을 끊어대는 구시대적 연출도 문제입니다.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는 컷신의 주인공에 어느 플레이어가 일체감을 느낄까요?


그리고 위 문제가 총집합한 마지막 미션 최종전투는 <미들어스> 최악의 오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나치게 잦은 컷씬, 뜬금없는 반전, 허무한 클라이막스 그리고 의미없는 결말까지... 앞서 지적한 모든 결점을 단 5분 남짓한 순간에 농축시킨, 핵폐기급 엔딩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게임팬으로서 

하지만 <반지의 제왕>이 아닌 게임팬으로서 <미들어스>는 분명 완성된 작품입니다.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의 유려한 전투와 <어쌔신 크리드>의 파쿠르를 제대로 소화해내어 '검증된' 재미를 보장한 것은 물론, <미들어스> AI의 정점인 네메시스 시스템을 도입하여 게임을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렸기 때문입니다. 비록 <미들어스>는 외전으로서 커다란 누를 남겼지만 게임으로선 커다란 성공을 남겼습니다.




[평점 : 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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