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10일 토요일

시간을 달리는 한국사, 국정 교과서의 귀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그렇다. 2015년 10월 7일, 드디어 새누리당은 한국사 교과서를 기존의 검정체제에서 국가가 발행하는 단일 교과서로 전환하기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말이 '잠정'이고 아직 대통령의 결정이 남아있다지만 사실상 밀어붙이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김정훈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은 "아직 최종 결정된 것은 없으면 단일 교과서로 갈지, 검정강화로 갈지 논의가 진행 중"이라며 아직 확정된 사안이 아님을 강조했다. 물론 이는 표정관리에 불과했다. '잠정' 결정이 이루어진지 고작 이틀 뒤인 10월 9일, 국사편찬위원회는 한국일보와의 통화를 통해 내년 10월까지 새 국정 교과서의 집필과 심의를 완료할 계획이 있음을 밝혔다. 깨알 같이 "검인정 체제가 유지될 가능성도 고려하고 있다"는 사족이 붙었지만 아무리 눈치없는 독자 제현이라도 이 말의 의미'없음'에 대해선 굳이 해설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한국사 국정화의 역사는 길다. 1972년 10월 17일, 유신체제를 통해 영도적 대통령 체제를 구축한 박정희 대통령은 종래의 11종이었던 역사 교과서를 하나로 통폐합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에 따라 1974년 1학기부터 유신 체제를 옹호하고 반공을 국시로 삼으며 정권의 경제정책을 홍보하는 내용이 골자가 된 '국사' 교과서가 문교부에서 발간되기 시작했다. 1982년, 이번에는 군사 반란으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이 5공화국을 미화하고 각지의 민주화 운동을 폄훼하는 내용을 추가하여 교과서를 개정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 군사 정권의 왜곡은 대부분 시정되었으나 참여정부를 지날 때까지 국사 교과서는 여전히 교육부에서 발행되었다. 2010년이 되어서야 중학교 국사가 검정 체제로 전환되었고 2011년엔 드디어 고등학교 한국사마저 그 뒤를 따랐다. 이로써 '국사'는 무려 37년이 지난 끝에서야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 했다. 그랬어야만 했다.




헤겔은 말했다. "역사는 반복된다." 마르크스는 덧붙였다. "첫번째는 희극으로, 두번째는 비극으로." 2013년, 한 출판사에서 집필한 한국사 고등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해서 세간이 들썩일 때만 하더라도 상황은 싸구려 희극처럼 보였다. 대한민국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겠다고 장담하던 교과서는 실로 가관이었다. 신뢰도가 의심스러워 대학교 학부생조차 꺼리는 출처를 통해 자료를 당당히 긁어모은 건 예사요, 이미 확인된 사실 관계마저 틀린 부분이 수백 군데나 드러나는 등 처음부터 끝까지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교육부가 출판사에 재수정을 요구했으나 그러고도 남은 오류가 수십 군데에 달했다니 그 심각성을 알만 하다. 그럼에도 한국사 교과서가 '좌편향'적이라고 굳는 사람들은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고 출판사를 옹호했다. 결국 이 희대의 교과서는 심연 속에 묻히기는 커녕 논란의 중심에 서서 한동안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호사를 누렸고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가 채택을 포기하는 와중에 기어코 한 고등학교의 간택을 받는 기염까지 토하고 만다. 참고로 학교의 이사장이 대통령 각하의 동생분이라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이다.




그러나 2년 전의 희극이 오늘의 비극을 알리는 전주곡이었음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부실 교과서의 무오성을 성경의 그것만큼이나 신봉했던 이들은 이내 새로운 희생양을 찾았다. 얄궂게도 교과서 검정 제도였다. 그들이 숭앙하던 교과서를 처음 세상에 선보였던 바로 그 법말이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었고 고전 비극의 막이 올랐다. 이제 비극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려하고 있다. 학교가 교과서를 선택했던 검인정 체제와 달리 국정 교과서는 선택의 대상이 아니다. 만약 2013년의 희극이 국사편찬위원회가 2017년에 편찬할 '국사'에서 재발한다면 전국의 학생들이 저질 코미디의 관객이 되는 것이다.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일인가! 승자인 지금 역사를 하루 빨리 남기고 싶은 심정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누구나 세탁하고 싶은 '흑역사'는 하나쯤 가지고 있는 법이고 존경하는 아버지의 과오를 인정하기 싫은 자식의 효성이란 것도 있다. 하지만 승리는 영원하지 않다. 배후에 계신 대통령 가카나 여당의 유력 대선후보님은 돌이켜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아버님께서 '지금' 어떻게 기억되고 계신지를.

댓글 2개:

  1. 매국노이자 독재자였던 놈의 딸이 대통령하는 나라에서 제대로 된 국사 교과서가 나오기를 바라는 건 개꿈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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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버지가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든 그건 대통령의 신분을 떠나 개인의 자유입니다. 다만 개인의 바람을 모두에게 가르치는 건 역사가 아니라 억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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